시인과 나

2013. 7. 5. 21:18내 삶의 흔적들/얘기

 

 

 

 

시인과 나

 

 

 

 

 

기숙사에 기거하며 한 달 내내 쉬지도 않고 120 시간이 넘는 연장근로를 하던 80년대 초..

내 나이는 20대 초반이었지만 심신은 이미 노년을 걸어가고 있는 듯이 빈약하고 허약했다

 

늘 공허했다. 내 몸 맨 꼭대기에 달린 토실한 머리도 나날이 텅 비어 가는 것 같았다

잠자는 것도 아끼며 일에 매달린 건, 나를 혹사하여 기억 속의 뭔가를 잊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무렵, 누군가에게서 시집 한 권을 얻었다

전화번호부 만 한 두께의 모윤숙님 시 전집이었다

누런 종이 위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다른 나라 사람 같았다

 

거침없는 표현을 서슴없이 하는 자유로운 영혼과 마주하니

그나마 남아있던 작은 내 존재감마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런 언어들...그런 생각들...

한 권을 다 읽을 때 쯤 이면 다시 앞쪽이 궁금해지는 묘한 느낌이 든 건 처음이었다

 

쳇바퀴 돌 듯 매일 반복되는 그런 일상은 뭔가를 잊기에 만족스러웠지만

그 시집을 되풀이 해가며 읽는 시간은 또 다른 뭔가를 얻기에도 충분했다

 

월요일마다 식당에서 나오는 고깃국을 먹는 것처럼 아주 맛있고 기름진 음식 같았고

그 고깃국이 먹고 싶어 일주일을 기다리던 시간처럼 그녀의 분신과의 데이트는 행복했었다

 

그리고 닫힌 입 속에서 자라던 우울한 생각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세상의 햇살이 내 어두운 그림자 위에도 조금씩 비춰 주는 것 같았다

 

문득 일과 공장에만 처박혀 있는 내 모습이 눈에 비춰 졌다

 

그래..

살기 위해 노력해 보자

사랑하려 애써 보자

바깥 세상에 등 돌리지 말고 조금씩 배워 보자

 

그 이후로 조금씩 내 발자국들은 공장 정문을 넘나들었고

좁은 내 시야도 철조망이 쳐진 공장의 높은 담을 넘고 있었다

그건 회사에 들어 간 지 3년이 지날 무렵이었으니 참으로 긴 시간을 침묵으로 보낸 것 같다

 

그 분의 사상과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어떠했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다만 그 당시의 내 생활과 대비되는 책 속의 자유로웠던 생각들이 좋았을 뿐...

 

유년시절의 어둡던 단면이 갑자기 생각나는 건 왜 일까?

 

 

 

201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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