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쓰기

2008. 5. 21. 23:32내 삶의 흔적들/얘기

 

 

 

빌려쓰기

 

 

 

 

사람이 살다 보면 갑자기 급하게 필요한 것들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둘러보면 필요한 모든 것들이 집 안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뭔가를 하려고 하다 보면 또 없는 것들은 왜 이리도 많은지...

 

가끔 변기가 막혀서 막대기 끝에 둥근 고무가 달린,

 변기 뚫는 기구를 매 번 빌리러 가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물을 아낀다고 변기 내리는 물속에 벽돌을 넣어놓은 관계로

녀석들이 휴지를 조금만 더 뭉쳐 넣으면 여지없이 막혀 버린다

 

이젠 그 기구를 사다가 놓을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빌리러 다닌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도 이런 일들이 일주일에도 몇 번씩 일어나고 있다

  

특히, 우리 집 근처에는 유난히도 많이 빌리러 오는 한 유별난 사람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만 해도 수 십 가지...

 

어떤 때는 밥을 빌리러 오기도 하고 정수기 물을 빌리러 오기도 한다

(사실 이런 종류의 것들은 빌린다고 하기보다 가지러 오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어떤 때는 상추를 빌리러 오고 어떤 때는 초고추장을 빌리러 오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김을 빌리러 오기도 한다

주로 먹는 것에 국한되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다리미가 고장 났다며 빌리러 오고 형광등이 없다며 빌려가기도 한다

   망치 드라이버 옷걸이 모자 등등등...

 

이건 뭐 거의 맡겨 놨다가 가져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아들 녀석들 끼리 친구 사이라 뭐라 말도 못하고 이웃 끼리 싫은 소리 하기도 그렇고 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며 살고 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명목상으로는 빌려 간다고는 하나

실제로 돌려주는지는 아직 한 번도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빌리러 온 뭔가를 주지 않았다고

집사람과 그 사람이 서로 말을 안 하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참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한다

 

어느 일요일의 오후,

볼 일이 있어서 외출을 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상기된 얼굴의 집사람이 나를 급하게 끌어당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전 11시쯤인가..

그 사람이 초인종을 눌러서 문을 열었더니

TV가 고장 났는데 고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면서 TV를 빌려 달라며 왔다는 것이다

 

한 대는 거실에서 아들 녀석들이 오락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고

다른 한 대는 안방에서는 집사람이 다른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라 머뭇거렸더니빌려줄 건지 말건지 말을 하라며 다그쳤고

어떻게 TV를 빌려 주냐며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더니 찬바람을 휑하니 남기며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낸  냉랭한 분위가가 마음에 걸렸던지 그 사람을 보내 놓고도 마음이 편치 않아

이 생각 저 생각 하고 있던 차에 내가 들어갔던 것인데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냐며 내 생각을 물어 보는데

 그 순간 나도 선뜻 답변을 할 수 없었다

 

한 참 후에 내가 한 대답은

어딘가 허전함이 묻어나는 웃음 뿐이었다

 

그 때 TV를 빌려 줬어야 했을까?

 

 

 

2008.05.20..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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