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2. 5. 21:27ㆍ내 삶의 흔적들/얘기
내일은,내일의 태양이 뜬다
3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의 가슴속에 살면서 다친 상처가 나을 때 쯤 이면 다시 덧나
결코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던, 그 아린 마음의 상채기를 간직하고 살아 온 날들이 모여서...
이제 나는 얼마 남지 않은 2007년이 다 가기 전에 그 많은 세월동안 원망과 미움의 대상이 되었던
오직 한 사람을 지우려 한다
아니, 내 마음의 평온을 위해 그를 용서 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때의 아픔을 떠 올리며 가슴 아파 하지 않으련다
결국, 그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로 더 이상 내 자신이 멍들고 싶지 않아서이다
현명한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빨리 잊고 다시 새로움을 찾는다는데
그 동안 난 너무 현명하지 못하게 살아왔음을 시인 하면서...
시골에 살았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무척이나 가난한 시기였다
우리집은 특히 그랬던 것 같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공무원을 그만두셨고
밤낮이 따로 없이, 술로 세월과 재산을 탕진하며 지내셨다
50대 중반, 돌아가실 때까지 그러고 사셨으니 짐안 형편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궁색했다
그때는 나라 전체가 어려울 때라 분식과 혼식을 장려했다
쌀밥 만 먹지 못하도록...
도시락 검사를 하는 날이면 어떤 친구들은 자기가 싸 온 도시락 위에
친구의 도시락에 있는 보리밥 몇 개를 얻어 쌀밥 위에 얹어놓기도 했다
국가 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점심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일일이 학생들의 도시락 까지 검사를 했으니 참...
초등학교 6학년의 어느 여름날인가
형편 상 도시락을 가져가지 못 한 날이었다
그날도 선생님은 점심시간이 되어 친구들의 도시락을 검사 하셨고
도시락을 싸 가지 못 한 나와 또 한 명의 친구는 선생님께 불려나가서는 칠판 밑 교단 옆에 꿇어앉아서
친구들이 도시락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왜 점심시간에 끓어 앉아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지금 생각해 봐도 도시락을 싸가지 못 한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었는지
왜 그렇게 해야만 했었는지 그 이유가 몹시 궁금하다
그렇게 제자를 꿇어앉혀 놓고도 삼삼오오 모여앉아 맛있게 점심을 드시던 그 선생님이 난 정말 미웠다
아니 증오스러웠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그리고 그때의 그 비참함이란...
그 다음 날도 난 도시락을 가지고 가지 못했다
그런데 점심시간 무렵, 어머니는 뭔가를 머리에 이고 오셨다
쟁반 같은 것을 풀어 놓으셨는데 그것은 큰 사기 밥그릇에, 뚜껑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수북하게 보리밥을 눌러 담은 밥상 이었다
누군게에게서 어제의 그 일을 전해 들으신게 분명했다
그러나 난 그 밥을 먹지 못했다
한참동안 나를 기다리시다가 어머니는 결국 다리품만 파시고는 다시 오셨던 그 길을
눈물로 얼룩 지우며 돌아 가셨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어머니께 했던 내 행동은
너무나 큰 불효를 한 것 같아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점심 시간에 맞춰서 따끈따끈한 밥을 해서는 쟁반에 고이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 정성을 몰라서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여서도 아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눈물과 함께 차마 그 밥을 넘길 수가 없어서였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울면서 뭔가를 먹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그 후로 나는,
그때가 생각 날 때 마다 그분을 원망하고 미워했다
아무리 용서를 하려고 해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세월이 어언 33년을 흘러오고 있다
그리고 은사라는 이름으로 가끔 얼굴도 봐야한다는 것이 나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인연의 고리라는 것이 얼마나 질긴 것인가
이제..
가슴속의 응어리를 털어 내려고 마음을 먹으니 참으로 후련하다
이 글은 여기에 남아 그때를 회상 하겠지만 훗날, 이 글을 다시 본다고 해도
그저 편안한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
한층 밝아진 내 모습과 함께...
찬바람이 스쳐간다
그러나 그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가슴은 언제나 따뜻했으면 좋겠다
가끔, 마음이 시려올 때 서로에게 기대어
그 따뜻함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2007.12.5.
..진.